바토리 에르제베트 백작 부인(Elisabeth Báthory, 1560년 8월 7일 ~ 1614년 8월 21일)은 헝가리 왕국의 귀족으로, 유럽 역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녀는 특히 젊은 여성들을 학대하고 살해했다는 혐의로 "피의 백작 부인(Blood Countess)"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흡혈귀 전설의 영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에르제베트의 악명은 그녀의 생애 후반부 사건들과 수많은 목격자 증언, 그리고 가문 및 당시 정치적 상황과 얽힌 논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 가문과 출생 배경
에르제베트는 헝가리 왕국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인 바토리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바토리 가문은 당대 유럽에서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 지역에서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모두 바토리 가문의 일원이었으며, 그들은 헝가리 왕국 내에서도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 중 하나였습니다. 또한 에르제베트의 가문은 뚜렷한 권력과 군사적 역량으로 유명했지만, 친척들 중에는 정신 질환과 폭력적 성향을 지닌 인물들도 많아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불온한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2. 어린 시절과 결혼
에르제베트는 어려서부터 귀족 가문 특유의 교육을 받았으며, 헝가리어, 라틴어, 독일어 등 여러 언어에 능통했습니다. 또한 학문적 소양을 갖춘 인물로 알려졌으며, 특히 천문학과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매우 뛰어난 미모와 지적인 면모로도 유명했는데, 이로 인해 헝가리 전역의 젊은 귀족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1575년, 15살에 나다슈디 페렌츠(Nádasdy Ferenc)와 결혼하여 헝가리 왕국의 귀족 사회에서 더 높은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페렌츠는 전쟁에서 유능한 군인으로 활약했으며, 당시 터키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결혼 생활 동안 에르제베트는 자녀를 몇 명 낳았으며, 남편이 전장에 있을 때는 혼자 성을 관리하고 영지의 경제를 책임졌습니다.
3. 성과 잔혹 행위에 대한 소문
페렌츠가 1604년에 사망한 후 에르제베트는 일련의 잔혹 행위와 살인 혐의로 악명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성에서는 수많은 소녀들이 실종되었으며, 일하는 하인들과 마을의 소녀들이 성 안에서 고문과 학대를 당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그녀는 젊은 여성들을 괴롭히며 그들의 피를 사용하여 "피의 목욕"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그녀가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시도했다는 전설이지만, 실제로 피로 목욕을 했다는 증거는 부족하며, 대부분이 후세에 부풀려진 이야기로 추정됩니다.
에르제베트의 잔혹 행위에는 심각한 고문과 학대가 포함되었습니다. 목격자들과 피해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소녀들을 채찍질하고, 가열한 쇠붙이로 몸을 지지고, 차가운 물을 뿌려 얼어붙게 하거나, 장시간 기아 상태로 방치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폭력적인 행위들은 그녀의 성 내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그녀의 측근과 하인들 또한 이에 가담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4. 체포와 조사
에르제베트에 대한 소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고, 그녀의 성에서 탈출한 일부 하인과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지면서 헝가리의 귀족 사회와 왕실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헝가리 국왕 마티아스 2세는 바토리 가문이 지나치게 강력해지는 것을 우려하며 그녀의 행동을 조사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마티아스 2세는 터조 제르지(György Thurzó) 백작을 비롯한 관리들에게 에르제베트의 성을 조사하도록 지시했으며, 1610년 그녀의 성에서 직접 체포되었습니다.
체포 당시, 에르제베트의 성 안에서 수많은 피해자들의 시신과 고문 도구들이 발견되었고, 이는 그녀가 저지른 범죄의 증거로 여겨졌습니다. 수백 명에 이르는 증인들이 그녀가 수많은 소녀와 여성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고 증언했으며, 이러한 증언을 바탕으로 그녀는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5. 처벌과 가택 연금
에르제베트는 공식적으로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녀가 강력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으로, 헝가리 귀족 사회는 직접적으로 그녀를 처형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가택 연금 처분을 받았으며, 자신의 성 안에서 일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1614년 사망할 때까지 가택 연금 상태에서 고립된 삶을 살았고, 철창문으로 봉쇄된 방 안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6. 에르제베트와 전설, 정치적 배경
에르제베트의 악명은 시간이 흐르며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녀가 저지른 범죄의 규모와 잔혹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당대의 정치적 상황 역시 이 사건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바토리 가문은 헝가리에서 매우 강력한 가문이었고, 이를 견제하려는 왕실과 다른 귀족들이 그녀의 범죄를 과장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또한, 에르제베트가 신교도였다는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당시 헝가리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갈등이 깊었고, 개신교 신자인 그녀가 가톨릭 귀족들에 의해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7. 현대에서의 평가와 문화적 영향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오늘날까지도 영화, 문학, 음악 등 여러 문화 콘텐츠에서 다루어지며 공포와 신비로움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녀는 흡혈귀 전설의 한 기원이 되었다고도 전해지며, 특히 그녀의 이야기는 '드라큘라'와 같은 흡혈귀 문학의 주요 영감이 되었습니다. 그녀에 대한 전설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극적으로 변형되었고, 이는 현대에 들어 에르제베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논란과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에르제베트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 동안 그녀가 단순히 잔혹한 살인자인지, 혹은 당시 정치적·종교적 배경 속에서 희생된 인물인지에 대한 복합적인 시각을 낳고 있습니다.
'오컬트연구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양사 아베노 세이메이(安倍晴明, 921년? - 1005년) (3) | 2024.10.13 |
---|---|
파라셀수스(Paracelsus)의 호문클루스(Homunculus)-초소형 인간 (1) | 2024.10.12 |
도플갱어(Doppelgänger) (3) | 2024.10.12 |
전기 자극으로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과학자 (0) | 2024.10.11 |
영혼의 무게는 21그램 (2) | 2024.10.11 |